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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하다

만년필에 스며들다

by sunshine5556 2025. 3.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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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민학교(현 초등학교 ) 6학년 때였던 것 같은데 만년필 하나를 선물 받았었다. 브랜드는 파카였는데 모델은 기억나지 않는다. 누구에게서 받았는지도 전혀 기억에 없다. 다만 기억나는 거라곤 만년필에 잉크를 넣는다고 온 손에 파란색 잉크를 묻혔었던 장면이다. 더불어 만년필로 무언가를 끄적였던 것 같기는 한데 무얼 적었는지는 모르겠다. 그 후, 세월이 흘러 그 펜이 어디로 사라졌는지도 관심 없이 볼펜이나 연필과의 인연만 이어왔다. 그러나, 40여 년이 지난 지금 다시 만년필이 궁금해졌다. 팟빵에서 '오디오매거진 월말 김어준'에 만년필연구소를 운영하고 계신 박종진 소장님이 나오셔서 들려주시는 만년필의 이야기에 젖어들면서부터다. 만년필의 역사와 각 브랜드의 특징, 만년필을 사용한 역사적 인물들의 이야기 등을 들으니 관심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에 따르면 어떤 만년필을 쓰냐에 따라 사용하는 이의 성향 등을 알 수도 있다고 한다. 이는 오랜 시간 만년필과 함께해 온 박 소장님만의 노하우라고 생각한다. 영화도 만년필이 나오는 영화만 본다고 하니 그 관심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나는 그저 그 옛날 내게 주어졌었던 그 만년필이 그리울 뿐이다.

  나는 글을 잘 쓰지는 못한다. 또한, 글씨가 바르거나 이쁘지도 않다. 앞뒤 없이 그저 끄적이고 있을 뿐이다. 가끔 쓰고 있는 일기 역시 그냥 직접적인 그날의 기록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년필이 갖고 싶어졌다. 그래서 일단, 아주 비싸지 않은 제품 중에서 필기감이 좋다고 하는 '라미 스튜디오 올블랙'을 찜하고,' 파카 큉크(QUINK) 잉크'와 같이 주문했다. 입문용으로 라미 사파리를 추천하기도 하던데 올블랙의 유혹을 이길 수 없었다. 노트는 볼펜으로 필사 중인 기존 노트를 사용하기로 했다. 노트가 좋으면 필기감이 더 좋다지만 나는 초보니까.

  택배로 만년필을 받은 날, 설레며 포장을 뜯고 상자에서 꺼내 조심스럽게 잉크를 넣고(여전히 손에 묻히며), 노트에 필사 중인 시집의 시를 써 내려갔다. 사각사각하는 소리가 기분 좋게 들렸다. 볼펜으로 쓸 때와 마찬가지로 글씨 모양은 엉망이었지만 사각거리며 흔적을 남기는 푸른색의 글씨가 나름 이뻐 보이기까지 했다. 그날 이후로 이 펜으로 필사하고, 메모도 하고, 일기도 쓰면서 만년필에 스며드는 중이다. 몇 년 전부터 엄지손가락이 좋지 않아서 글씨를 많이 쓰지 못하는 편인데도 자꾸 쓰고 싶어 지기까지 하니 만년필의 능력인가 싶다.

  만년필의 구조를 간략하게 설명하면 펜촉인 닙(NIB), 잡는 부분인 그립(GRIP), 몸통인 배럴(BARREL)로 나뉜다. 물론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닙만 해도 부분마다 기능에 따른 명칭이 많다. 하지만 나 같은 초보에겐 너무 험난한 길이라 생략한다. 배럴을 돌려서 그립과 분리한 후 잉크 카트리지나 잉크를 채운 컨버터를 끼워 사용하면 된다. 카트리지 사용이 편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컨버터에 잉크를 넣어 사용하는 것이 더 매력적이다. 잉크 색상은 보통 블루와 블랙, 블루블랙이 있다. 만년필이 여러 개라면 각각 다른 색상으로 사용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잉크뿐만 아니라 이 길로 들어서면 노트와 펜레스트와 케이스 등 이 세계의 물품들에 눈길이 쏠린다고들 한다. 나 역시 그럴 것 같은 기운을 느끼지만 엄격하게 눈동자를 통제하고 있다. 

  마니아처럼 만년필을 분석하고, 연구하고, 여러 개를 수집하면서 기쁨을 느끼지는 못하지만, 단순히 쓰는 행위만으로도 즐거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만년필이 하나밖에 없기도 하고 마니아도 아니기에 내 것이 얼마큼 좋은지 또는 다른 만년필들과 비교해 어떤 차이가 있는지 구분할 수는 없다. 그저 만년필로 쓰는 재미를 뒤늦게 알았을 뿐이다. 희망이 있다면 언젠가 '파카 51' 빈티지를 갖는 것이다. 현재 판매되고 있는 파카 51은 과거에 나왔던 것을 재생산하는 것인데 구조적인 차이도 있고 그 기능이 옛것을 따라가지 못한다고 한다. 그래서 만년필을 아는 사람들은 파카 51의 경우 옛날에 생산되었던 펜이 명품이라 말한다. 이베이에서 많은 거래를 한다고 하는데, 이베이에 뛰어들 자신은 없고,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매년 서울의 중구 구민회관에서 열리는 펜 쇼에 가보고 싶다. '펜후드'라는 만년필 카페에서 운영을 하는 행사인데 다양한 만년필을 구경할 기회가 주어지고 원하는 펜을 구매할 수도 있다고 한다. 나에게 올 '파카 51'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기대해 본다.

  연필, 볼펜, 플러스펜 등 각각의 펜마다 나름의 기능과 즐거움을 주는 요소가 있다고 생각한다. 만년필 또한 그것만으로 느낄 수 있는 운치가 있다. 나머지 펜들과는 다른.

                    지극히 평범한 일상에 만년필과 더불어 소소한 재미가 생겨났다. 고맙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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