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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의 방

빈센트 반 고흐 / 화가의 방

by sunshine5556 2025. 4.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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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집 주방 싱크대 상부장의 한편에 고흐의 그림 '아를의 침실'이 17년 동안 붙여져 있습니다. 정확하게는 아를의 침실을 보고 따라 그린 그림입니다. B5 사이즈의 종이에 연필로 그리는 밑그림 없이 바로 아트펜으로 그린 것이라 구도도 엉성하고 선이 잘못된 부분도 있지만 좋아하는 그림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해바라기'에 열광할 때도 나는 '아를의 침실'이 좋더라고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 그림을 보고 있으면 고흐를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따라 그린 아를의 침실

 

  빈센트 반 고흐는 1853년 3월 네덜란드의 준데르트라는 곳에서 태어났습니다. 빈센트라는 이름은 그의 할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으로 그 이전에 사산되었던 아이의 이름이었다고 합니다. 그의 뒤로 세 자매와 두 형제가 태어났는데 그중 하나가 빈센트와 가장 친했으며 조력자였던 테오입니다. 

  그가 열한 살 때, 준데르트에서 제벤베르겐의 기숙학교로 들어갑니다. 그 당시에는, 그림을 그렸지만 그다지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고 합니다. 더불어 부모와 떨어져 있어 그에게는 불행한 시절이기도 했습니다. 2년 뒤, 틸부르그의 중등학교에 다녔지만, 중간에 학교를 그만둡니다. 

 

  빈센트는 삼촌의 도움으로 열여섯의 나이에 국제 미술상인 Goupil & Cie에서 연수생으로 입사를 하게 됩니다. 그 후, 그의 동생 테오 역시 브뤼셀에 있는 구필의 지점에서 일을 하게 되고, 우리가 알고 있는 빈센트와 테오의 서신교환의 시작점이 됩니다. 그 당시 그는 구필의 런던 지점에 있었는데, 대영박불관이나 내셔널 갤러리 등을 방문하며 예술과 가까워집니다. 더불어 이 시기에 종교와도 가까워집니다. 1875년 아버지와 삼촌의 권유로 파리 지사로 전근을 가지만 적응하지 못하고, 결국 1년 뒤 구필로부터 해고통보를 받습니다. 

열아홉 살의 빈센트 반 고흐(반 고흐 미술관)

 

  그 후. 빈센트는 목사의 조수로 일하기도 하고, 목회자가 되고자 시험도 치르지만 실패하게 됩니다. 점점 더 종교에 몰두한 그는 1879년 보리나주의 광산촌에서 평신도 선교사로 활동하면서 자신의 소유물을 포기하고 가난한 광부와 그들의 가족을 위해 헌신했지만, 해고를 당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광부들 곁에서 무급으로 선교활동을 이어갑니다.

 

  그는 종종 테오에게 편지를 쓰면서 스케치 같은 작은 그림을 동봉했는데, 테오는 이를 보고 그에게 그림에 더 집중하라고 권유합니다. 1880년 테오의 권유로 브뤼셀에 있는 왕립미술아카데미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곳에서 그림기법들을 익히고 다른 예술가들과 만나게 됩니다. 그때부터 그는 직업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파리에 있는 Goupil & Cie의 매니저로 일하는 동생 테오는 그에게 재정적 지원을 해주며 그가 그림에 집중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반면에 그의 부모들은 장남인 그가 그림을 그린다는 것에 대해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이것은 그와 부모 사이의 갈등을 야기했습니다. 

 

  빈센트는 헤이그에 있는 화가인 그의 사촌 안톤 모브를 방문해 수채화를 비롯한 그림수업을 받습니다. 모브와의 관계는 매춘부이며 아이가 있는 시엔과의 동거생활 때문에 끝이 납니다. 시엔과 헤어진 후 그는 드렌테의 시골로 내려가 그곳의 아름다운 풍경 등을 그리지만, 추위와 외로움 등을 이유로 다시 부모의 집으로 들어갑니다. 그곳에서 그는 농부들 같은 시골의 노동자를 그렸습니다. 그는 테오에게 제공받은 재정적 지원의 대가로 그림을 보내고 테오는 파리 미술시장에서 그림을 팔고자 했지만, 빈센트의 그림은 당시 사람들이 원하던 그림의 취향에 맞지 않았습니다. 

 

  부모는 그와 함께 사는 것을 힘들어했는데, 1885년 아버지의 사망 후 그는 부모의 집을 나와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생활하며 교과서에도 실려있는 'The Potato EAters' 작업을 시작합니다. 그림이 어둡고 침침하다는 테오의 지적으로 채색을 연구하며 다양한 색을 사용하기 시작합니다. 1886년 1월 왕립미술아카데미에 등록하지만, 교수와의 갈등으로 아카데미를 나와서 파리로 가 동생 테오와 함께 거주하게 됩니다. 

 

 

  구필의 매니저였던 테오는 그에게 모네 같은 예술가들의 다채로운 작품들을 소개해주고, 빈센트 또한 페르난도 코르몬의 스튜디오에서 새로운 예술가들과의 교류를 통해 영향을 받았습니다. 밝은 색을 사용해 짧은 붓터치로 자신만의 스타일을 만들어 갑니다. 주제 또한 농부와 시골 노동자 등에서 카페와 해, 시골의 꽃과 정물로 바뀌어 갑니다. 한편, 일본 목판화의 영향을 받기도 합니다. 2년의 파리 생활 후 그는 도시 생활에 질려 1888년 프랑스 남부의 작은 마을 '아를'로 옮겨갑니다.

 

  아를에서의 생활은 빈센트 반 고흐에게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시기였습니다. 고갱과의 만남도 그곳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빈센트와 고갱은 같이 거주를 했지만, 너무나 상반되는 그들의 스타일 때문에 항상 긴장이 흐르곤 했습니다. 어느 날, 고갱은 떠나겠다고 했고 빈센트는 면도칼로 고갱을 위협하는 일이 발생합니다. 그는 그날 저녁, 자신의 귀를 잘라 신문지에 싸서 매춘부에게 선물을 하는데, 이 때문에 이튿날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됩니다. 병원에서 퇴원 후 다시 그림을 그리지만, 급격하게 나빠지는 정신건강으로 인해 그는 스스로 정신병원에 자발적 입원을 합니다.

 

  정신적인 문제에도 불구하고, 그는 병원에 있는 동안 150여 점의 그림을 그리는 열정을 보였습니다. 그가 병원에 있는 동안 테오가 결혼을 하고 아들을 낳았는데, 테오 부부는 빈센트의 이름을 그들의 아들에게 붙여주었고, 고흐는 그들에게 'Almond Blossom'이라는 특별한 그림을 보냅니다. 1888년부터 테오는 빈센트의 그림을 파리에서 열리는 'Salon des Independants'에 출품해오고 있었고,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 시작합니다.

Almond Blossom(반 고흐 미술관)

 

  1890년 5월 그는 정신병원을 퇴원하고, 몇몇 예술가들이 거주하고 있는 오베르쉬르와즈로 향합니다. 그곳에서 그는 아마추어 화가인 가쳇과 가까워지며, 열정적으로 그림에 몰두합니다. 7월 초 파리에 있는 동생을 방문한 그는 직장을 그만두고 자신의 사업을 하고자 하는 동생의 말을 듣고는 재정적 불안감을 안고 돌아옵니다. 이 일은 그에게 엄청난 타격을 주었고, 1890년 7월 27일 그는 밀밭으로 들어가 그의 가슴에 총을 쏩니다. 그리고 29일 사망합니다.

 

  모두가 알다시피 빈센트 반 고흐는 사후에 널리 이름이 알려진 화가입니다. 또한, 인정을 받은 대부분의 그림을 정신질환의 이유로 자살하기 전 10년 동안 작업한 그림입니다. 그가 사망한 후 테오가 고흐의 기념 전시회를 열었고, 1891년 1월 테오가 사망한 후 그의 부인 조가 빈센트의 작품을 알리려 많은 노력을 했다고 합니다. 1914년에는 빈센트가 테오에게 보낸 편지의 초판을 출판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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