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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의 방

에곤 실레 / 빛처럼 살다

by sunshine5556 2025. 4.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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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곤 실레는 1890년부터 1918년까지 짧은 생을 살았던 예술가입니다. 그의 그림을 보면 제일 먼저 드는 느낌은 강렬함입니다. 선과 붓의 터치에서 느껴지는 강렬함이 우리나라의 천재 작가 '이상'을 떠올리게 합니다. 만약 그들이 동시대, 같은 나라에서 만났다면, 분야는 다르지만 서로의 예술세계에 영감을 받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에곤 실레는 1890년 6월 오스트리아의 툴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 아돌프 오이겐 실레는 철도회사 직원으로 툴른역의 역장이었는데, 이는 실레가 어린 시절 철도에 대한 관심을 갖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실레가 어린 시절 그린 그림의 대부분은 기차가 주를 이루었다고 합니다.

  에곤 실레가 빈 미술 아카데미로 가기 전 1905년에 오래전부터 정신적 고통을 받아오던 그의 아버지가 매독으로 죽음을 맞이하는데, 이는 실레에게 매우 큰 충격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는 어머니와는 달리 유독 아버지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기에, 아버지의 죽음은 그에게 깊은 상실감을 갖게 했습니다. 어머니와의 갈등은 후에 그의 작품에서도 나타납니다. 당시, 그는 자화상을 그리며 상실감을 채웠다고 합니다. 

두 개의 자화상

 

  1906년 그는 후견인인 레오폴트 치하체크와 어머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빈 미술 아카데미에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아카데미에서의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수업은 개성 있는 스타일을 추구하던 실레에게는 그리 만족할 만한 수업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아카데미의 수업을 받는 와중에도 그는 구스타프 클림트로 대표되는 분리파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받았습니다. 특히, 클림트에 대한 애착은 우상과 다름없었다고 합니다. 후에 그가 클림트를 만났을 때 자신의 그림 다수와 클림트의 그림 한 점을 교환하자고 했는데, 클림트가 실레의 작품이 더 뛰어나다며 그림 한 점을 교환하고 그 외 여러 점을 구입했다고 합니다. 클림트가 죽을 때까지 실레는 클림트를 우러러봤다고 합니다.

 

 

 

  분리파는 19세기말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작가들이 기존의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전시 활동에 반기를 들고 자신들만의 스타일을 표현할 수 있는 전시회를 따로 기획하고 실행하던 새로운 작가들의 집단을 말합니다. '분리하다'라는 라틴어 동사에서 가져온 분리파는 딱딱하고 틀에 갇힌 전통에서 분리하여 새로운 표현을 추구하는 집단이었습니다. 최초 분리파는 1892년 폰 슈툭을 중심으로 제1회 전시회를 열었으며, 1897년 클림트를 회장으로 하는 비엔나 분리파가 생겨났습니다.

 

   1909년 실레는 아카데미를 떠나 친구들과 '신 미술가협회'를 창립하고 제1회 전시회를 파스코 화랑에서 개최합니다. 그즈음 클림트의 영향에서 벗어난 자신만의 새로운 스타일을 선보였습니다. 1910년 실레는 그의 친구 에르빈 오젠과 빈을 떠나 남부 지방 크루마우에 작업실을 얻고, 자신과 오젠의 누드를 집중적으로 그립니다. 1911년에는 클림트의 모델이었던 발리 노이칠과 동거를 하며 그녀를 모델로 한 그림을 그려나갑니다. 그러나, 노이칠과의 자유분방한 생활과 그의 외설적인 그림들 때문에 크루마우에서 쫓겨나서 노이렝바흐로 옮기게 됩니다. 하지만, 어린 여자 모델들을 데려다가 강압적으로 외설스러운 자세를 요구한 그는 3주 동안 유치장에 갇히게 됩니다. 미성년자를 유혹하고 강간했다는 죄목으로 고소당했지만, 이 죄목은 법정에서 기각당하고, 외설적인 그림을 어린 소녀들이 볼 수 있는 곳에 놔두었다는 이유로 유치장 신세를 지게 됩니다.

에곤 실레

 

  다시 빈으로 돌아온 그는 1913년 오스트리아 예술가 협회에 들어가 여러 전시회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 후, 1915년 발리 노이칠과의 동거를 끝내고, 전 해부터 교류하던 하름스 자매 중 에디트 하름스와 결혼합니다. 결혼 이후 실레는 아버지의 죽음에 따른 상실감이나 어머니와의 갈등을 보이던 작품들에서 변화를 보입니다. 모성 또는 가족의 주제를 가지고 사실주의적 기법을 활용하기도 합니다. 결혼하자마자 실레는 1914년에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의 영향으로 동원되어 프라하를 비롯한 여러 곳에서 군 복무를 하고 1917년 빈으로 돌아옵니다. 이 무렵 '전쟁 전시회'의 조직에 참가했을 뿐만 아니라 여러 전시회를 거치며 대중적인 성공을 이루기도 합니다.

 

  1918년 2월 클림트가 사망한 후 에곤 실레는 제49회 빈 분리파 전시회의 회장을 맡습니다. 실레는 전시회의 포스터를 제작하고, 전시회에서 대부분의 작품이 판매되는 성과를 이루어 냅니다. 같은 해, 아내 에디트가 병이 나서 죽고, 10월 31일 그 또한 에디트가 죽은 지 사흘 만에 스페인 독감으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무릎을 구부리고 앉아 있는 여자

 

  2년 전인가 홍대 근처에서 열리는 에곤 실레의 전시회에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규모가 작아서 무척 실망한 기억이 나는데, 입구 위쪽에 크게 그려져 있는 그림이 생각납니다. 얼핏 보고 에곤 실레의 자화상인 줄 알았는데, 제목이 '무릎을 구부리고 앉아 있는 여자'더라고요. 지금도 이 그림에서 에곤 실레를 보곤 합니다. 에곤 실레의 작품 중 '두 개의 자화상'과 더불어 좋아하는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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